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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대화하다: 교황 요한 23세와 가톨릭의 변화

arrowmaster 2025. 4. 14.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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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과 대화하다: 교황 요한 23세와 가톨릭의 변화

현대 사회는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공존하는 시대입니다. 그중에서도 종교는 단순한 신앙을 넘어, 역사와 문화, 정치, 사회에 이르기까지 인간 삶의 근간을 형성해왔습니다. 특히 가톨릭은 오랜 시간 동안 '불변의 진리'라는 이름으로 변화보다 유지를 선택해왔던 대표적인 종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가톨릭이 오늘날, ‘변화’와 ‘대화’라는 단어와 함께 언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흐름의 시작에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착한 교황' 요한 23세**, 그의 삶은 마치 한 편의 역사서이자 인류 보편가치에 대한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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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신부에서 세계의 목자로

📷 본 블로그에 사용되는 이미지는 운영자가 직접 이미지 생성 도구를 활용하여 제작합니다. Images used in this blog are created by the author using AI-based image generation tools.


1881년,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 소토일 몬테.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안젤로 론칼리**는 처음에는 조용히 시골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역 사제들의 눈에 띄어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며 점차 교회 내 입지를 넓혀갑니다.

교황청 외교관으로 발탁된 그는 **그리스, 불가리아, 터키** 등 비가톨릭 국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냅니다. 정교회, 이슬람 세계, 무신론 사회 속에서 그는 배척보다 대화를 선택했고,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기보다 타 문화를 이해하는 데 힘썼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12,000여 명의 유대인을 비밀리에 구출**하며 행동하는 양심의 상징이 되었고, 이후 프랑스에서는 나치 협력 문제로 갈등을 겪던 주교단을 중재하여 **프랑스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그가 추기경이 되고 베네치아 대주교로 임명된 것은 단순한 승진이 아니라, 시대가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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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으로 선출된 '과도기의 인물'

1958년, 교황 비오 12세의 선종 이후 진행된 콘클라베는 프랑스-이탈리아 간의 대립으로 장기화되었고, 고령이자 중립적인 인물로 평가받던 **론칼리 추기경이 교황 요한 23세로 선출**됩니다. 많은 이들은 그를 ‘과도기용 교황’, ‘절충안’이라 불렀고, 임기 중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도기 교황’은 재위 5년 동안 그 누구보다 과감하고 깊은 개혁을 추진합니다. 그는 교황궁을 나와 **로마 빈민가, 아동 병원, 교도소**를 직접 찾았고, 교황으로서는 전례 없던 **유대교, 성공회, 심지어 소련 공산당 인사들과도 대화의 장을 열었습니다.**

“무신론자라고요? 괜찮습니다. 노인의 축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은 벽을 허물고 마음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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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창문을 열다

가장 큰 전환점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이었습니다. 당시 교황청은 “긴급한 위기도 없는데 왜 공의회를 열어야 하느냐”며 반대했지만, 그는 말했습니다.

> “교회는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들여야 합니다.”

그 말처럼 공의회는 가톨릭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400년 넘게 유지되던 **라틴어 미사가 각국의 언어로 전환**되었고, 비(非)가톨릭 인사들의 회의 참석이 허용되었으며, **가난한 국가, 비서구권, 제3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하면서 교회의 시선은 서구 중심에서 세계 전체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회의에는 **영국 성공회, 정교회, 개신교, 고(古)가톨릭 등 28개 교회에서 93명의 참관인**이 참석했고, 요한 23세는 그들과 대등하게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단순한 만남이 아닌, ‘대화의 교회’로서 가톨릭이 변화한 상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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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는 떠났다, 그러나 남았다

안타깝게도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첫 번째 결의문이 채택되기도 전에 1963년 선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이어지며 **가톨릭의 세계화, 인권, 사회 정의를 위한 행보의 뿌리**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열린 리더십, 마더 테레사의 헌신, 헨리 나우웬의 고백적 신학**은 모두 요한 23세의 바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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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을 이해하기 위한 어제의 이야기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론 중, 단상에 올라와 뛰노는 어린아이를 보고 “그대로 두라”고 말했던 그 장면. 권위보다 배려, 규율보다 공감이 앞서는 행동.

그 한 마디의 배경에는 **세상과 대화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요한 23세의 용기와 철학**이 있습니다.

그는 종교의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았고, 교회가 세상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변화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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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및 더 보기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Vatican.va](https://www.vatican.va/archive/hist_councils/ii_vatican_council/index.htm)
- 『요한 23세 평전』 – Thomas Cahill, 문학동네
- 『현대 가톨릭의 이해』 – Richard P. McBrien, 바오로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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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글은 'Master’s Mind' 블로그의 인문·종교 콘텐츠입니다.  
> 질문이 있는 글, 대화가 있는 종교, 세상을 관찰하는 시선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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