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ions are weapons. Thoughts are shields.

“질문은 무기가 되고, 생각은 방패가 된다.”

역사 · 문화 비평/전쟁과 한국사 9

한국전쟁 ep.6 - 서울 재함락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서울을 다시 내주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UN군과 국군은 반격을 준비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쟁은 점차 고착화되기 시작했다.한반도는 이제 속도가 아닌 지속의 전쟁, 장기전에 돌입했다.1. 1·4 후퇴 – 서울, 두 번째로 빼앗기다1951년 1월 4일. 서울은 또다시 함락되었다.중공군의 대대적인 개입과 은밀한 야간 침투에, 전선은 무너지는 듯 보였다.수많은 민간인들이 다시 남하했고, 수도를 내준 충격은 엄청났다.그러나 이번 후퇴는 이전과 달랐다.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를 통해 살아 돌아온 병력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UN군은 퇴각과 동시에 후방에 새로운 방어선과 반격의 구상을 세웠다.“서울을 빼앗겼다고 전쟁을 잃은 것은 아니다.”– 더글러스 맥아더2. 전열 재편 – 반격의 시작은 살아남은 자들이었..

한국전쟁 ep.5 - '장진호 전투' 얼어붙은 지옥에서 싸운 자들

"전쟁은 늘 전선을 따라 흘러가지 않는다.때론 그 전선을 잃고도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 전쟁을 바꾼다."– 올리버 P. 스미스, 미 해병 제1사단장 1950년 11월, 북진의 끝은 전쟁의 끝이 아니었다.유엔군이 승리를 확신하던 그 순간, 전장의 균형은 무너졌고기온은 영하 30도 아래로 떨어졌다.그리고, 장진호 전투는 '전술적 후퇴'라는 개념을 넘어인간의 한계와 구조의 기적을 시험하는 전장이 된다.1. 중공군의 개입 – 전쟁은 다시 뒤집혔다1950년 10월 말, 중국 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넘었다.그들은 낮에는 움직이지 않았고, 밤에는 불도 피우지 않았다.유엔군 정찰기와 통신망을 피해 야간 분산 기동, 무전 침묵, 측후방 침투로이미 한반도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11월 25일, 중공군은 청천강 일대에서 기습적..

한국전쟁 ep.4 북진과 38선 – 우리가 너무 빨랐던 이유

“통일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전선은 너무 넓었다.”북진은 단순한 과욕이 아니었다. 전쟁 초기의 압도적 반격과 유엔의 지지는 전선을 북으로 밀어붙일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평양을 지나 압록강까지 나아가며 전선은 지나치게 확장되었고, 중국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기울기 시작한다. 통일의 문턱에서 멈춰야 했던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놓쳤던 걸까.🔥 북진, 그 찬란했던 기세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 이후, 전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서울을 수복한 유엔군과 국군은 10월 초 38선을 넘으며 북진을 본격화했다.당시의 분위기는 명확했다.“이제 전쟁을 끝내자. 남북을 통일하자.” 트루먼 행정부는 유엔의 결의 아래 북진을 승인했고, 국민적 열망도 통일에 기울어 있었다.10월 중순 평양은 함락되었고, ..

한국전쟁 ep.3 인천상륙작전 – 밀린 전쟁의 판을 뒤집다

1950년 9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했다.그 무모해 보였던 결단은 전쟁의 흐름을 단숨에 바꾸었다.🧭 절망의 전선에서 바다를 지목하다1950년 여름, 전쟁은 한반도 남쪽 끝까지 밀려났다.서울은 개전 나흘 만에 함락됐고,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겨우 의지한 채 저지선을 형성하고 있었다.이때 극동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전세를 뒤엎을 단 하나의 방법으로 상륙작전을 꺼내 들었다.그 지점은 인천이었다.⚠️ 실패 확률 80%? 모두가 반대한 작전인천은 상륙작전에는 최악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조수 간만의 차가 89m, 하루 중 2~3시간밖에 상륙 가능 시간 없음좁은 S자형 수로, 대형 함정 진입 어려움상륙 가능한 해변 좁고, 월미도에는 북한군 해안포대미국 합..

한국전쟁 ep.2 낙동강 전선 – 최후가 아닌, 시작이었다

서울이 함락된 뒤, 모두가 절망하던 그때, 낙동강 전선은 ‘최후’가 아닌 ‘시작’이었다.대한민국 정부는 부산까지 후퇴하며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고, 국군과 미군은 이곳에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서울 함락, 대한민국은 무너졌는가?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에 의해 서울이 함락되었다.정부는 대전, 이어서 부산으로 내려가며 임시수도 체제를 수립했다.대통령 이승만은 '한반도 남단에서 끝까지 싸우겠다'며 전선 유지를 선언했고,이 퇴각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국가를 지속시키기 위한 전략적 결단이었다.🇺🇸 미군의 첫 전투, 오산에서의 ‘지연전’UN 안보리 결의로 미군 제24사단이 한국에 도착했고,그들이 처음 맞닥뜨린 전투는 **오산 전투(7월 5일)**였다.이 전투는 미군과 북한군..

한국전쟁 ep.1 개전 – 서울은 잃었지만, 그들은 버텼다

한강 방어선, 시간과 목숨으로 지켜낸 전선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이 시작되었다.서울은 빠르게 무너졌지만, 국군은 도망치지 않았다.한강 방어선, 그곳은 기억해야 할 이름 없는 영웅들의 전선이었다.1. 새벽 4시,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전면 남침을 감행했다.포병, 보병, 전차가 동시에 움직이는 기계화 기습전.당시 국군은 일요일 정기휴무 중이었고, 일부 지휘관은 부재 상태였다.무전기도, 탄약도 부족했다.하지만 국군은 처음부터 항복하지 않았다.“그날, 우리에겐 총보다 무전기가 먼저 필요했다.”— 국군 5사단 참전자 증언2. 서울은 무너졌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북한군은 불과 이틀 만에 개성-문산-의정부 전선을 돌파하며서울 북부에 도달..

세계가 함께한 전쟁 – 유엔군, 그 최초의 기록

🕊 국제연맹의 실패에서 UN 창설까지2차 세계대전의 잔혹함은 인류에게 뚜렷한 경고를 남겼습니다.이전의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이상을 품었지만, 실질적 구속력 없이 각국의 이해에 흔들려 결국 무력화되었고, 다시 전쟁은 일어났습니다.그 교훈 위에서, 1945년 10월 24일. 세계 51개국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을 창설했습니다.UN은 단순한 외교 협의체를 넘어, 실질적인 평화와 안보 유지를 위한 국제적 구조를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미래 세대들을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하고자 결의했다.”– UN 헌장 전문 중 핵심 기구인 안전보장이사회는 5개 상임이사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그리고 중화민국)에게..

한국전쟁(6.25)은 유도된 전쟁이었는가? – 음모론을 깨는 역사적 기록들

한국전쟁에 대한 '남침 유도설'과 '북침설'은 수십 년간 회자되어 왔지만, 이는 소련 붕괴 후 옐친 대통령이 공개한 문서와 미군의 실제 대응 상황, 한국군의 병력 상태를 통해 반박되고 있다. 이 글은 역사적 문서와 정황을 기반으로, 그 음모론의 허구를 밝힌다.1. 에치슨 라인 – ‘배제’가 아닌 ‘오판’1950년 1월, 당시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우리의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본다.”– Dean Acheson, National Press Club, Jan 12, 1950 이른바 **에치슨 라인(Acheson Line)**이었고, 여기에는 한국과 대만이 명시되지 않았다.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미국이 한국을 ..

귀신잡는 해병대, 그 별명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 – 통영상륙작전과 세계가 본 해병대의 용맹

오늘날 한국 해병대를 말할 때면 거의 자동처럼 따라붙는 별명이 하나 있다.바로 **‘귀신잡는 해병대’**다.강하고 용맹하며, 싸움에 두려움이 없다는 의미로 통하는 이 표현은수많은 매체와 국민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물음을 놓친다."도대체 왜 해병대는 귀신을 잡는 존재로 불리게 되었을까?"🧭 통영에서 시작된 해병대의 실전1950년 8월 17일,한국 해병대 제1대대는 경상남도 통영에 상륙했다.당시 낙동강 방어선이 위협받던 시기,해병대는 해상에서 단독으로 통영 시내를 돌파해불과 5일 만에 북한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전과를 올렸다.이 작전은 해병대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이었으며,이후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 한 전례이자 모범으로 평가받는다.📰 뉴욕타임즈 보도, 그리고 ‘귀신’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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