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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문화 비평/전쟁과 한국사

한국전쟁 ep.3 인천상륙작전 – 밀린 전쟁의 판을 뒤집다

arrowmaster 2025. 6. 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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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했다.
그 무모해 보였던 결단은 전쟁의 흐름을 단숨에 바꾸었다.


🧭 절망의 전선에서 바다를 지목하다

1950년 여름, 전쟁은 한반도 남쪽 끝까지 밀려났다.
서울은 개전 나흘 만에 함락됐고,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겨우 의지한 채 저지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때 극동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전세를 뒤엎을 단 하나의 방법으로 상륙작전을 꺼내 들었다.
그 지점은 인천이었다.


⚠️ 실패 확률 80%? 모두가 반대한 작전

인천은 상륙작전에는 최악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조수 간만의 차가 89m, 하루 중 2~3시간밖에 상륙 가능 시간 없음
  • 좁은 S자형 수로, 대형 함정 진입 어려움
  • 상륙 가능한 해변 좁고, 월미도에는 북한군 해안포대

미국 합참, 해군, 국방장관까지 일제히 반대했으며,
워싱턴에서는 “차라리 부산을 지켜라”는 여론이 강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천은 가장 불가능한 곳이다. 그렇기에 적은 그것을 대비하지 않는다.”

 


🧠 맥아더의 전략: 지형·심리·기습의 삼각 작전

맥아더는 철저한 계획 하에 작전을 수립했다.
인천의 조수 시간표, 상륙 지점, 해안포 위치는 물론,
북한군의 병력 분산 상황까지 면밀히 분석했다.

작전 직전에는 허위 무전 송신, 함대 이동 기만,
병력 배치 교란 등 심리전도 병행했다.

결국 작전명 **크로마이트(Operation Chromite)**는 승인되었고,
1950년 9월 15일 새벽, 인천을 향한 상륙이 시작된다.


🕰 1950년 9월 15일 – 인천, 그날의 작전

상륙 전력:

  • 미 해병 제1사단 (사령관: 올리버 P. 스미스)
  • 유엔 해군 함정 260척 이상
  • 해군 항공대 및 공군 폭격기
  • 한국 해병대 소규모 병력 (후방정리 및 초계임무 참여)

▪️ 04:30 – 월미도 상륙

  • 선발대 상륙 후 격전
  • 고지 점령 및 해안포 제압

▪️ 17:30 – 인천 내항 상륙

  • 간조 시간대에 맞춰 본진 상륙
  • 항공·함포 사격 이후 주요 지점 신속 장악
  • 인천 시가지는 비교적 저항 없이 확보

작전 이틀 만에 인천은 완전히 점령되었고,
곧바로 서울 수복 작전이 이어진다.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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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해병대의 강습, 한국 해병의 조용한 동행

이 작전은 미 해병대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나,
한국 해병대도 보조 병력으로 참여했다.
인천상륙 당시에는 초계 및 후방 안정화 임무를 수행했다.


🟥 북한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 그러나 너무 늦었다

최근 러시아와 중국 자료에 따르면,
소련 해군은 9월 초 서해상 미군 기동 상황을 포착하고
북한에 경고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정황이 있다.
중국도 미군의 도쿄 인근 해병 재배치에 주목하고 있었으며,
북한은 상륙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북한은 인천이라는 지점을 배제했다.
지형이 어렵고, 큰 함정이 들어오기 힘들 것이라 오판했다.

결국 인천에는 해안경비대 수준의 병력만 배치되었고,
상륙 직후 대응할 여력도, 회복할 시간도 없었다.


🏁 서울 수복, 전세 대반전

9월 20일 – 서울 진격 개시
9월 25일 – 시가지 대부분 확보
9월 28일 – 이승만 대통령, 서울 수복 공식 선언

서울은 한 달 전 손실된 도시였다.
그리고 이제, 그 도시의 탈환은 전쟁의 흐름 자체를 바꾸는 상징이 되었다.

맥아더는 세계 전쟁사에서도 손꼽히는 대규모 기습 상륙의 설계자로 기억된다.


🧭 왜 인천에서 끝내지 않았는가 – 북진 결정의 정치적 배경

서울 수복으로 38선 회복이라는 당초 목표는 달성되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곧 북진 통일 작전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

  1. 트루먼 행정부의 냉전 반공 전략
    – 공산 확산을 저지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로 판단
  2. 소련의 유엔 불참 → 거부권 행사 불가
    – 당시 유엔 중국 대표권 문제로 소련은 퇴장 중
    – 중화민국(대만)이 상임이사국 → 북진 결의 통과
  3. 맥아더의 작전 기획
    – 이미 평양-압록강선까지 진격 계획 수립
  4.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 지향
    – 9월 30일 “평양 수복” 담화 발표

🌪 새로운 전쟁의 문이 열린다

서울 수복은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끝이 아니었다.
곧이어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중국은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며 개입을 경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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