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ions are weapons. Thoughts are shields.

“질문은 무기가 되고, 생각은 방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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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외전 ep.3 – 카르타고의 최후: 살라미나 이후의 로마식 ‘기억 말살’

“Carthago delenda est.”“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기원전 149년 원로원 연설에서 기억되지 말아야 할 도시.로마는 전쟁에서 이겼지만, 기억은 살아 있었다.그래서 그들은 불태우고, 무너뜨리고, 이름을 지우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1. 로마의 불안은 끝나지 않았다 – 자마 이후의 트라우마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한니발을 꺾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났을 때, 로마는 승리한 듯 보였다. 하지만 두려움은 끝나지 않았다.카르타고는 다시 일어났다.무역과 상업을 기반으로 경제를 재건하며, 지중해의 중요한 교역항으로 되살아난 것이다.무장할 수는 없었지만, ‘부활한 도시’라는 인식은 로마 원로원의 불안을 자극했다.노쇠한 카토는 매 연설마다..

로마사 외전 Ep.2 – 티투스, 성전을 불태우다

로마 제국의 손에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 AD 70년, 티투스가 이끈 유대 전쟁은 단순한 반란 진압을 넘어 종교와 문명의 충돌이자, 제국의 질서를 세우는 잔혹한 방식이었다.1. ‘제국은 질서를 말했지만, 이 땅은 신을 불렀다’ – 유대 전쟁의 본질AD 69년, 로마는 ‘4황제의 해’를 거치며 권력의 혼란기를 마주했지만, 결국 동방 총독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에 오르며 제국은 안정을 되찾았다.그러나 로마가 복원한 것은 황제의 질서였지, 모든 속주가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는 아니었다.유대 지역의 분노는 제국의 안정과 무관하게 타올랐다.이 땅의 반란은 단순한 지방 문제도, 일시적 충돌도 아니었다.로마의 눈에는 '반란자들의 불온한 정치행동'이었지만, 유대인에게는 신성한 공간이 침범당한 신의 전쟁이었다.제국은 황제..

그들은 전쟁을 걸었다 ep.9 – 불타는 하늘을 설계한 사나이, 커티스 르메이

“우리는 승리를 원했고,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커티스 르메이1. 빈민가의 소년, 하늘을 오르다1906년 미국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에서 태어난 커티스 르메이는,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자주 일자리를 옮겼고, 가족의 생계는 늘 위태로웠다. 르메이는 일찍부터 **‘기술이 생존을 보장한다’**는 철학을 품었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ROTC를 통해 장교가 되었고, 1930년대 초 미 육군 항공대에 입대하면서 그의 전쟁은 시작되었다.르메이는 처음부터 뛰어난 비행 기술보다 항공기 정비와 실용 전략에 밝은 인물이었다. 그에겐 전쟁이 철학이 아닌 수학처럼 느껴졌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내려면, 전쟁은 감정이 아니라 계산으로..

로마사 외전 Ep.1 – 스파르타쿠스, 자유를 향한 검투사

1. 검투사의 이름으로 제국에 칼을 겨누다기록이 짧고 권력자의 시선이 지배하던 시대,한 사람의 이름이 로마 전체를 뒤흔든 적이 있다.그는 왕도 아니었고, 귀족도 아니었다.그는 노예였다. 그리고 그는, 스파르타쿠스였다.그는 단지 쇠사슬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제국이라는 시스템 그 자체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2. 트라키아인의 검 – 스파르타쿠스의 기원그는 트라키아 출신이었다.트라키아는 오늘날의 불가리아, 그리스 북부, 터키 일부에 걸쳐 있던 고대 지역이다.이곳은 헬레니즘과 스키타이 문화가 혼재했던 전사 문화의 중심지로,로마는 종종 트라키아인들을 용맹한 기병대와 보조병으로 징집했다.트라키아 전사들은 뛰어난 체력과 투지를 지닌 존재로 알려졌고,스파르타쿠스 역시 단순한 농노가 아닌, 이 지역 출신의 숙련된 전투자였..

동로마사 ep.5 – 최후의 황제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와 쇠락의 길

“마지막 황제는 성벽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이름과 함께 사라졌다.”1. 라틴인의 도시를 되찾다 – 1261년, 콘스탄티노플 수복1261년, 니케아 제국의 황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라틴 제국의 허점을 포착해 콘스탄티노플을 기습 점령한다. 이로써 57년 동안 라틴인들의 손에 있었던 로마인의 도시가 되찾아졌고, 동로마 제국은 형식적으로 부활했다. 하지만 회복된 도시는 예전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황궁은 버려졌고, 성벽은 무너졌으며, 제국의 중심에는 더 이상 세계를 지배하던 힘이 없었다.제국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군사력은 쇠퇴하고, 주변국의 위협은 커져갔다.팔라이올로고스 왕조는 내우외환 속에서 '동로마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마지막 로마 황제 가문으로, 이후 약 200년 동..

동로마사 ep.4 – 십자군과 라틴 제국 – 로마인의 도시가 약탈되다

“로마가 로마를 공격했다.그날, 제국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찢겨졌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다.이는 이교도에 의한 침략이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교 세계 내부에서 일어난 ‘형제의 약탈’이었다.1. 신의 이름으로, 로마를 공격하다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본래 이슬람으로부터 성지를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그러나 제4차 십자군(1202~1204년)은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방향을 틀어 기독교 세계의 중심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게 된다.이 결정의 배경에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의 이동을 돕기로 한 베네치아는 막대한 운송 비용을 미납한 십자군들에게 **“대신 다른 도시를 공격하라”**는 조건을 내걸었다.무역중심의 배네치아는..

전쟁과 스포츠 ep.1 - 유고 내전과 1990년 크로아티아

1990년 5월, 자그레브의 축구장은 경기장이 아니라 전쟁의 전선이었다.디나모와 즈베즈다의 충돌은 공이 아닌 주먹과 돌로 이어졌고,그날의 피비린내는 곧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로 번져간다.1. 운동장이 전장을 대신할 수 있었던 때, 그렇지 못했던 날요즘의 스포츠는 갈등과 분열을 넘어,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을 가지곤 한다.경쟁이지만, 규칙이 있고, 승복이 있으며, 무엇보다 평화롭다.그러나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스포츠는 때로 전쟁의 대리인이 되었고,폭력과 증오, 민족주의의 전장이 되기도 했다.과거, 전쟁은 검과 창을 들고 싸우는 무력의 충돌이었다.오늘날 그 흔적은 스포츠의 여러 종목에 녹아 있다.펜싱은 귀족들의 결투를,복싱과 레슬링은 생존의 격투를,양궁과 사격은 사냥과 전투 기술을,럭비와 미식축구는 진형..

동로마사 ep.3 – 비잔틴의 재편과 동서교회의 결별

로마의 이름을 가졌지만, 비잔틴 제국은 점차 그리스화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 변화는 종교적, 문화적 갈등을 야기했고, 결국 동서 교회의 대분열로 이어졌다.1. 로마 제국의 유산을 입은 그리스의 제국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을 ‘제2의 로마’로 선포했을 때, 그 뿌리는 분명 로마에 있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동로마 제국은 점차 ‘로마적 외피를 입은 그리스 세계’**로 변화해간다.제국의 공용어는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뀌었고,행정·법률·교육·철학 체계는 점점 헬레니즘 문화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콘스탄티노플은 로마가 아니라 고대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의 정신을 닮아갔다.이제 제국은 더 이상 검투사나 원형 경기장이 상징하는 ‘서방의 로마’가 아니었다.성화(icon)와 돔 형태의 교회, 그리고 복..

전쟁과 음식 ep.9 – 마가린, 전쟁이 만든 대체의 맛

누군가는 마가린을 가짜라 했고,누군가는 그것 덕분에 하루를 더 살았다.전장의 참호 속, 빵에 발라진 하얀 지방은살아 있다는 감각 그 자체였다.1. 진짜처럼 보이되, 진짜여선 안 되는 것오늘날 마가린은 흔히 식물성 지방으로 만들어진다고 알려져 있다.하지만 그 시작은 전혀 달랐다.프랑스 제2제정기,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말했다.“군인과 가난한 자를 위한 버터를 만들어라.”그 결과물이 우지(소기름)와 우유로 만든 하얀 지방이었다.이름은 마가린.빛은 진주 같았고, 맛은 기름 같았다.Margarine – 그리스어 margarites(진주)에서 비롯된 이름처럼하얗고 반들반들했지만, 그것은 ‘진짜’는 아니었다. 병원, 군대, 구빈소에서 조심스레 쓰였고,민간은 그것을 ‘가짜’라 부르며 외면했다.하지만, 전쟁은 ‘진짜냐..

동로마사 ep.2 – 양면전쟁의 함정 페르시아와 이슬람, 두 제국의 충돌

로마의 계승자, 비잔틴 제국은 동방의 위협 속에서 영토를 지켰으나 결국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를 범했다. 이란 고원과 아라비아 사막에서 벌어진 전쟁은 제국의 체력을 무너뜨렸고, 새로운 문명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1. 유스티니아누스 이후, 황제들의 피로한 제국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남긴 유산은 찬란한 건축물과 일시적인 영토 회복이었지만, 동시에 제국의 재정과 병력은 한계에 부딪혀 있었다. 후계자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끝없는 국경 분쟁 속에서 황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특히 마우리키우스(재위 582~602)는 국고를 안정시키기 위해 군인들의 급여를 삭감하고 겨울철 병력 철수를 금지하는 등 강도 높은 절약 정책을 펼쳤다. 이는 국경 방어에는 일정 효과를 보았지만, 혹독한 추위 속에서 고통받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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