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ions are weapons. Thoughts are shields.

“질문은 무기가 되고, 생각은 방패가 된다.”

역사 · 문화 비평/고대·중세 유럽사

모두가 꿈꾼 제국, 로마Ep.4 – 율리우스 카이사르: 권력은 어떻게 시민을 사로잡는가

arrowmaster 2025. 6. 25. 09:31
반응형

술라는 독재로 공화정을 정리하려 했고, 카이사르는 그 법과 전쟁 모두를 무기 삼아 권력에 올랐다. 그가 남긴 것은 제국의 문이었다. 그러나 그 문은, 피로 열렸다.


1. 술라의 귀환, 그리고 공화정의 피바람

기원전 83년, 술라는 동방 원정을 마치고 귀국해 다시 로마로 진격한다.
콜리나 문 전투에서 술라는 마리우스파의 저항을 꺾고 도성을 장악하며, **로마 역사상 최초의 무기한 독재관(dictator perpetuo)**이 된다.

그는 정적들의 이름을 **공개 처형 명단(프로스크립티오)**에 올려 숙청했고, 로마는 공포 속에서 잠시 질서를 되찾는다.
하지만 그 질서는 법이 아니라 칼에 대한 복종이었다.

카이사르는 이 시기, 술라에게 목숨을 위협받던 민중파 귀족 가문 출신의 청년이었다.
그는 정치의 모든 것이 무력에 의해 바뀌는 시대를 가장 먼저 목격한 세대였다.


2. 혼돈의 삼각동맹 – 제1차 삼두정치의 탄생

술라 사후, 로마는 다시 권력 공백기에 들어간다.
이때 부상한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 크라수스: 로마 최대의 자산가,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웠으나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한 인물
  • 폼페이우스: 술라 휘하의 젊은 장군으로, 미트리다테스 전쟁과 동방 원정을 성공시켜 로마 영토를 넓힌 국민적 군사 영웅
  • 카이사르: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지만 민중파와 손잡고 떠오른 젊은 정치인

기원전 60년, 이 세 사람은 서로의 이해를 위해 **비공식 권력 동맹인 삼두정치(Triumvirate)**를 결성한다.
정식 헌법기관은 아니었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원로원을 능가했다.

  • 크라수스는 세금 계약권을,
  • 폼페이우스는 동방 식민지 안정을,
  • 카이사르집정관직과 갈리아 총독직을 얻는다.

로마의 정치 질서는 이제 공식 제도와 비공식 거래가 공존하는 시대에 접어든다.


3. 삼두정치의 군형이 무너지다. – 크라수스의 죽음

하지만 이 삼각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다가 ‘카라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당시 그는 삼두 중에서 군사적 명성이 가장 부족했기에 이를 만회하고자 **파르티아(현재 이란 지역)**를 침공했다.
그러나 4만명의 로마군은 1만명의 파르티아 군에게 패배한다.

파르티아 기병 중심 전술로 인해 로마군은 궤멸되었고, 그의 아들도 전사했다.

전투 후, 크라수스는 협상 도중 파르티아 측에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은 삼두정치의 균형을 무너뜨렸고, 남은 두 사람—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4. 폼페이우스 – 가장 영광스러운 적

폼페이우스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다.
그는 미트리다테스 왕을 무너뜨리고, 시리아·유대 지역을 정복해 동방의 패권을 로마에 가져온 장군이었다.
또한 이베리아에서의 승리 이후 귀국하던 길에 스파르타쿠스 반란군의 잔당을 처리하면서,
공식적으로는 ‘로마를 구원한 영웅’의 지위까지 얻게 된다.
진압의 실질적 공로는 크라수스에게 있었지만, 정치적 명예는 폼페이우스가 가져갔다.

그는 질서와 명예, 법적 권위의 상징이었고,
무장 민중의 지지를 받는 카이사르와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권력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초기엔 동맹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두 사람의 길은 갈라지고 있었다.


5. 갈리아로 간 이유 – 군대 없는 권력은 허상이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를 마치자마자 갈리아 전역을 관할하는 총독으로 임명된다.
그는 단지 변방을 다스리러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군대를 만들러 간 것이었다.

기원전 58년부터 50년까지, 갈리아 원정은 약 8년에 걸쳐 이어졌다.
수십 개의 부족을 제압하고, 브리타니아(영국)까지 진출,
그리고 알레시아 전투에서 갈리아 연합의 영웅 베르킨게토릭스를 항복시킨다.

그의 병사들은 그에게 충성했고, 그의 전과는 《갈리아 전기》라는 글로 로마 전역에 전해졌다.
이제 그는 전쟁, 글, 명성을 동시에 거머쥔 인물이었다.


6. 로마의 문턱, 루비콘 강

기원전 50년,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총독직 해임과 무장 해제 명령을 내린다.
그 명령의 표면적인 이유는 임기 만료였지만, 실상은 그의 권력을 두려워한 원로원 다수파와 폼페이우스의 공조였다.
삼두정치는 이미 무너졌고, 크라수스의 죽음 이후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수호자처럼 자리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무장을 해제한 채 귀환하면, 곧바로 내란 선동죄로 기소하고 정치적으로 제거할 계획이었다.
그에게는 면책특권도, 병사도 남지 않을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침묵을 깨고 제13군단과 함께 루비콘 강을 무장한 채 건넌다.
이 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라, 무기를 들고 로마 정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한 법적 경계선이었다.
그가 강을 넘는 순간, 공화정은 다시 내전으로 진입했다.

"Alea iacta est." – 주사위는 던져졌다.

📷 본 블로그에 사용되는 이미지는 운영자가 직접 이미지 생성 도구를 활용하여 제작합니다. Images used in this blog are created by the author using AI-based image generation tools.


7. 내전, 그리고 평화 아닌 복종

카이사르는 단숨에 로마를 장악하고,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한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치지만 그곳에서 암살당하고,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동맹을 맺어 이집트를 우호국으로 돌린다.

이후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종신 독재관, 최고 사제, 민중의 영웅이 되어 로마를 재편하기 시작한다.


8. 칼로 이룬 권력, 칼로 끝나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력(태양력)**을 도입하고, 채무를 감면하고, 식민지를 확대하여 실업층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로마 시민에게 전쟁 없는 안정과 확실한 혜택을 제공한 통치자였다.

하지만 그의 모든 개혁은 "그가 독재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과 함께였다.
그의 권력이 원로원의 자율성을 무력화하고, 공화정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던 귀족 계층의 권익을 잠식한다는 점에서, 원로원 다수는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장 입구 계단에서 칼에 찔려 암살당한다.
공모자는 무려 60여 명에 달했으며, 그중 중심에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가 있었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개인적으로 신뢰하고, 양자처럼 대하던 귀족 청년이었다.
그가 찔렀을 때, 카이사르는 충격 속에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Et tu, Brute?" – 브루투스, 너마저도..."

 

브루투스는 훗날 말했다.

"나는 공화정을 살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공화정은 더 이상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은 카이사르의 죽음이 아니라, 로마 공화정의 장례식이었다.


9.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 누가 폭군인가

카이사르는 독재자였다. 그러나 그 독재는, 무너진 제도 속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구조였다.
그는 법을 어겼지만 전쟁을 끝냈고, 그는 권력을 모았지만 혼란을 막았다.
그가 해체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무능과 계파로 가득 찬 '제도의 탈을 쓴 권위'였다.

카이사르는 술라의 공포를 본받지 않았고, 마리우스의 복수심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검과 신화, 개혁과 실리, 모든 것을 이용해 로마를 통치했고,
결국 그는 시민의 지지를 얻은 독재자였다.

그런 그를 죽인 것은 칼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로마를 구하지 못했고,
오히려 제정 로마라는 전혀 다른 질서를 불러왔다.



🔎더 많은 시리즈, 더 깊은 이야기로

 

🔗Master's Mind [개인정보처리방침 및 이미지/저작권 정책 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