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약 이케다야 사건 이후 신선조는 교토 수호의 영웅이 되었지만, 내부의 균열과 외부 정세의 급변 속에서 점차 시대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히지카타와 야마나미의 갈등, 쵸슈의 무력 진입과 샷초 동맹의 형성, 그리고 막부의 몰락 속에서 신선조는 끝까지 검을 들었고, 그 끝엔 곤도 이사미의 처형과 흩어진 잔존 세력만이 남았다.
🏯 이케다야 이후, ‘영웅’이 된 신선조의 그림자
1864년 7월, 이케다야 사건은 교토를 지키려는 신선조의 존재를 일본 전역에 알렸다. 낭인 조직이던 그들은 단숨에 막부 공인 무장조직으로 격상되었고, 교토 시민과 막부로부터 ‘도성 수호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외면의 찬사 속에서도, 내부의 균열은 조용히 심화되고 있었다.
총장 야마나미 게이스케와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 간의 갈등은 단순한 성격 차이를 넘었다. 야마나미는 보다 온건하고 이념 중심적이었고, 히지카타는 철저한 규율과 실전 중심의 지도자였다.
결국 1865년, 야마나미는 신선조 탈퇴를 시도했고 발각되어 할복 자결한다. 히지카타는 끝까지 냉정했지만, 그 결정은 내부적으로도 깊은 충격을 남겼다.
🔥 총성이 울린 교토 – 금문(禁門)의 변과 쵸슈의 폭주
이케다야 사건의 보복으로, 쵸슈 급진파는 같은 해 8월 교토 고쇼(御所) 인근에 무장을 들고 진입했다. 이른바 금문(禁門)의 변. 이들은 천황 거처 인근에 포격을 가하며 당대 가장 무거운 정치적 금기를 어겼다.
이 사건은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닌, 정권의 정통성 자체에 도전한 반란으로 간주되었고, 막부는 즉시 **쵸슈 정벌령(1차 토벌)**을 선포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력 충돌 없이 종결되었고, 쵸슈는 무사히 후퇴한다. 이때부터 막부의 권위는 형식적 대응과 실제력 간의 괴리로 약화되기 시작한다.
🕊 사카모토 료마, 그리고 샷초 동맹의 결성
쵸슈의 복귀는 사츠마번의 전향과 맞물리며, 결정적 국면을 맞는다. 1866년,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사츠마와 쵸슈는 손을 잡고 샷초 동맹을 결성한다.
막부 체제의 틈새를 파고든 이 동맹은, 외형상은 번간 협력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신정부 구상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 신선조는 여전히 교토의 치안과 안보를 책임지고 있었지만, 이미 정치의 중심축은 신흥 세력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 마지막 전선 – 신선조의 전투와 붕괴
1868년, 보신전쟁이 발발한다. 막부군은 도쿄에서 우에노, 고후, 아이즈, 하코다테로 후퇴했고, 신선조도 각 전선에 투입된다.
하지만 시대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신정부군은 서양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신선조는 과거의 전술로 버티고 있었다.
총장 곤도 이사미는 1868년 4월 신정부군에 체포되어, 5월 이타바시 형장에서 도적죄로 처형된다. 그의 죽음은 명분 없는 조롱처럼 느껴졌고, 신선조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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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코다테 최후의 불꽃 – 히지카타의 끝
히지카타 도시조는 끝까지 무기를 놓지 않았다. 구 막부 해군과 함께 에조 공화국을 수립하고, 하코다테 전투에서 저항한다.
1869년 6월, 그는 전투 중 전사한다. 그의 죽음은 신선조의 마지막 붓질이자, 사무라이 시대의 종언이었다.
🌿 흩어진 잔향 – 남은 자들의 길
신선조의 잔존 세력은 흩어졌다.
나가쿠라 신파치: 경시청에 편입, 『신선조기록』을 남기며 역사를 기록
사이토 하지메: 신정부에 흡수되어 경찰로 활동, 메이지 유신 후까지 생존
일부는 낭인으로 떠돌거나, 이름 없는 병사로 사라졌다
그들의 선택은 모두 달랐지만, 그 뿌리엔 신념과 시대의 이음매가 있었다.
🧭 맺음말 – 검을 든 자들, 질서의 수호자였는가 희생자였는가
신선조는 체제를 위해 태어났다. 도사 출신도, 하급 낭인도, 계급의 벽을 넘어 그들은 질서의 수호자가 되고자 했다.
1편에서 우리는 현 체계에 순응하며 오히려 그 안에서 파열을 일으킨 조직, 2편에서는 질서의 수호에서 정치의 한가운데로 진입한 권력화의 과정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 그 끝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소모되어 간 한 무리의 마지막 검이었다.
그들은 체제의 병기로 사용되었지만, 결코 권력의 주체는 아니었다.
검(劍)은 있었지만, 방향을 정할 수 없었고 충(忠)은 있었지만, 시대를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충’은 타락한 권력에 바친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시대 속 ‘질서 그 자체’에 바친 신념이었다.
신선조는 몰락했지만, 그들이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질서와 충의는 시대가 바뀌면 버려지는 것인가? 개인은 체제를 믿고 따르는 것 외에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