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실패했고, 고립되었으며, 위대한 전략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승리했다.”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Ulysses S. Grant)는 미국 남북전쟁의 전장을 휘어잡은 인물이자, 훗날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그를 단순한 영웅 서사로만 기억하는 것은 이 인물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는 출발부터 특별하지 않았고, 오히려 평범한 청년으로, 종종 실패자에 가까운 인물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전쟁의 방식과 철학, 그리고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깊이 재조명되고 있다.
1. 웨스트포인트 졸업생, 그러나 빛나지 못한 청년 시절
그랜트는 웨스트포인트(미국 육군사관학교)를 1843년에 졸업했지만, 성적은 21위(39명 중)로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포병이나 공병이 아닌 기병이나 보병에 배치되었던 것도 그의 약한 체력과 소극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전공 과목은 수학이었으며, 기수로서 말 다루는 데는 능했지만, 동료들 사이에서 특별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인물로 기록된다.
그 후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참전하며 경험을 쌓았지만, 그 역시 화려하진 않았다. 전쟁 후 서부 변경지대에 배치되며 외로움과 고립에 시달렸고, 가족과 떨어진 생활 속에서 알코올 문제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 그는 1854년, 상관의 감찰 하에 알코올 문제로 인해 자발적 전역을 선택해야 했다. 이때 그는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느꼈고, 이후 수년간 생계를 위해 가축 장사, 농업, 세일즈 등을 전전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2. 전장에서 자기를 증명하다 – 빅스버그와 새 전략의 탄생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랜트는 다시 군에 복귀할 기회를 잡았다. 초반에는 일리노이 주 방위군의 소령으로 활동했지만, 자신을 적극적으로 군에 어필하며 여러 주에 걸쳐 복귀를 희망했고, 결국 북군에 재임관되었다.
그랜트는 초반 전투에서 과감하고 빠른 진격으로 주목받았다.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은 1863년 빅스버그 전투였다. 당시 북군은 미시시피강을 남북으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 강을 중심으로 남부는 병참과 보급을 이어나갔다. 그랜트는 전통적인 포위전 대신 우회 기동을 시도했다. 그는 군을 남하시킨 뒤 다시 북상하며 빅스버그를 포위했고, 결국 남군을 항복시켰다. 이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정교한 공세적 기동작전 중 하나로 평가되며, 그랜트를 링컨의 주요 전략가로 부상시켰다.
당시 북군의 다른 지휘관들은 대체로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경향을 보였다. 조지 맥클렐런은 병력 편제에 집착하고 진격을 미루는 성향이 강했으며, 헨리 핼렉은 과도하게 신중했다. 반면, 그랜트는 병력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전장을 흔드는 진격을 선택했고, 그 전략은 종국적으로 통했다.

3. 그랜트 vs 로버트 리 – 냉철함과 집념의 대결
남부군 최고사령관 로버트 E. 리는 전통적인 귀족적 명성과 함께 전략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인물이다. 그는 방어전과 기동전 모두에 능했고, 전장에서의 매너와 품격으로도 존경받았다. 반면, 그랜트는 그다지 전통적인 영웅상이 아니었다. 그는 과묵했고, 승리를 자축하지 않았으며, 때때로 거칠고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전쟁 후반부, 그랜트는 리를 상대로 피터스버그 전투와 윌더니스 전투 등에서 끊임없는 공세를 이어가며 남군의 병참과 병력을 소모시켰다. 전략적 의미에서 그는 소모전의 개념을 적용한 최초의 미국 지휘관이라 할 수 있다.
링컨은 이에 대해
"그의 단순하고 굳건한 집념이 전쟁을 끝낼 열쇠"
라고 표현한 바 있다.
흥미롭게도, 리가 항복을 요청했을 때 그랜트는 매우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며 리를 예우했고, 그의 병사들이 말과 무기를 가지고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이는 남북의 화해를 위한 첫걸음이었으며, 그랜트가 단순한 군인이 아닌 정치적 리더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4. 전장에서 대통령으로 – 승리 이후의 책임
그랜트는 전후 인기를 바탕으로 미국의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1869-1877). 그는 전후 남부의 재건과 흑인 권리 보호, 남부 연방의 재편에 힘썼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은 논란이 많았다. 특히 그랜트 행정부 내 부정부패와 측근주의는 큰 비판을 받았고, 정치적 카리스마는 부족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끈 시기, 미국은 남북전쟁의 여운을 딛고 연방을 복원했으며, Reconstruction 정책의 근간을 마련했다. 훗날 그는 대통령으로서보다는 장군으로서 더욱 위대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5. 사과 주스와 말없는 전장의 전략가
남북전쟁 시기 그랜트는 술에 대한 오해도 많았다. 초기 알코올 문제는 그를 낙인찍었지만, 실제 전쟁 중 그는 대부분 절주하며 사과주스를 즐겨 마셨다고 기록된다. 링컨은 이에 대해 “그의 주류가 전쟁을 이긴다면, 다른 장군들에게도 그 주류를 보내주라”는 말로, 오히려 그랜트의 과단성과 결단력을 높게 평가했다.
또한, 그는 셔먼과의 우정을 통해 전략적 협동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셔먼은 그의 전략적 의도를 완벽히 이해하고, '바다로의 행군(March to the Sea)'이라는 전례 없는 총력전 작전을 실행했다. 이 조합은 북군의 후반 승리의 핵심 동력 중 하나였다.
6. 왜 그는 지폐에 새겨졌는가
오늘날 그랜트는 미국 50달러 지폐에 새겨져 있다. 이는 단순히 전쟁에서의 승리 때문이 아니다. 그는 미국이 가장 분열되었을 때, 실용성과 결단력으로 전쟁을 이끌었고, 전후에는 조심스럽게 국가 통합을 시도했다.
그는 귀족적 품격도, 독창적 철학도, 정치적 카리스마도 없었지만, 끈기와 전략, 상황에 맞는 결정을 내리는 리더십으로 미국을 다시 하나로 엮은 인물이었다. 한때 주변으로부터 버림받은 그가, 결국엔 미국의 심장부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이유다.
마무리: 위대함은 특별함에서 오지 않았다
그랜트는 태어날 때부터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평범했고, 흔들렸으며, 종종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가장 혼란한 시대에 자기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고, 자신을 증명했다. 그의 이야기는 영웅이 아니라, 시대를 이끈 인간으로서의 리더가 어떻게 역사를 남기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실마리다.
📌 본 콘텐츠는 Master’s Mind 인물평전 시리즈 중 하나로, 단순한 전기적 서술을 넘어 시대와 인물의 내면을 함께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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