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꿈꾼 제국, 로마Ep.3 – 마리우스와 술라: 내전의 문을 열다
공화정은 제도 안에서의 갈등을 조율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마리우스와 술라는 그 공간에 칼을 들이밀었다.
로마는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자기를 찔렀고, 무력 충돌은 이제 정치의 한 방식이 되었다.
1. 그라쿠스 이후의 로마 – 갈라진 틈
그라쿠스 형제의 죽음은 공화정 로마에 깊은 금을 남겼다.
빈부 격차는 더 깊어졌고, 로마 시민들의 불만은 더 이상 연설로 달래지지 않았다.
민중은 ‘자신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지도자’를 원했고, 기득권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만 몰두했다.
이 균열 속에서, 두 명의 장군이 떠오른다. 마리우스, 그리고 술라.
2. 무산자를 모은 장군, 마리우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자수성가한 평민 출신 장군이었다.
그는 징병제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무산자 계층을 군대에 편입시키는 군사 개혁을 단행한다.
무산자(프로레타리우스)란 토지나 재산이 없어 투표권도 약하고 군 복무 자격조차 없던 하층민으로,
로마 사회의 가장 바닥에 속한 시민이었다.
국가가 아닌, 장군에게 충성하는 병사들.
그 개혁은 단순한 병역제도의 변화가 아닌, 로마 정치의 지형을 바꾼 사건이었다.
마리우스는 남부 이탈리아의 동맹시 반란을 진압하며 민중의 영웅이 되었고, 다수파(평민파)의 정치적 중심에 섰다.
3. 전통의 칼날을 든 자, 술라
반대편에는 귀족 출신의 장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있었다.
그는 원로원의 지지를 받는 수구파의 대변자였고, 마리우스의 대중적 인기와 군사 개혁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방에서 미트리다테스 왕이 봉기하며 로마는 또다시 전쟁에 휘말린다.
원로원은 술라에게 원정 지휘권을 부여했지만, 마리우스는 이를 무효화하고 자신에게 위임하라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당시 로마는 원로원이 외교·군사적 권한을 지니고 있었지만, 민중회의(평민회)를 통해 법률을 제정하면 원로원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구조적 허점이 있었다.
마리우스는 이 점을 이용해 자신의 측근인 법무관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앞세워 법안을 통과시켰고, 군대 지휘권마저 다수파의 표결로 뒤바뀌는 위험한 선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결정이 로마 정치사의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게 만든다.
4. 로마 최초의 시가전 – 제1차 내전
기원전 88년, 술라는 군단을 이끌고 로마 시내로 진군한다.
이전까지 로마 병사들은 로마 성벽 바깥에서 해산하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술라는 그 관례를 깨뜨렸다.
그가 이끈 5개 군단은 아피아 가도를 따라 진입했고,
마리우스파는 급히 민병대를 조직해 포룸(공회장)과 언덕 지대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로마는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이 시민을 향해 칼을 겨누는 전장이 된다.
전투는 전략적이라기보단, 혼란과 유혈이 낳은 참극이었다.
시가전은 며칠간 지속됐고, 민가와 성소까지 불타오른다.
마리우스는 탈출했고, 술라는 도시를 장악하며 반대파를 처형했다.
로마인들은 처음으로 정치적 분열이 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5. 피를 부른 권력, 술라의 복수
술라는 곧이어 동방 전선으로 떠나지만, 공백을 틈탄 마리우스는 다시 복귀한다.
복수의 화살은 로마 내부를 겨냥했고, 원로원 의원과 술라 측 인물 다수가 숙청되었다.
이 피바람은 끝이 아니었다.
내전의 전통은 이제 확고해졌고, 로마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6.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 로마는 자기 손으로 자기를 찔렀다
정치는 대화를 멈춘 순간, 칼이 등장한다.
술라는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무장을 들고 수도를 점령했고, 마리우스는 복수로 응수했다.
이제 칼은 더 이상 외부의 적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내부 권력 다툼의 도구가 되었다.
제도가 균형을 잃고, 민중의 분노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언제나 무력과 공포였다.
다음 편에서는, 이 내전의 구조를 한층 세련되게 재현한 한 인물을 만난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