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시선인가 – 삼국지연의부터 환단고기까지, 해석과 책임의 역사
역사는 해석이다. 그리고 그 해석에는 책임이 따른다.
– 역사라는 이름으로 무책임한 상상이 넘쳐나는 시대에
🧭 역사, ‘사실’이 아니라 ‘해석’의 이야기
우리는 흔히 역사를 ‘과거의 사실’이라 부르지만,
사실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주관적인 해석의 결과물이다.
누가, 언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도 전혀 다른 의미로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대 사서든, 현대의 다큐멘터리든,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 진수의 정사 vs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중국 삼국지다.
진수(陳壽)가 기록한 《삼국지》는 사료에 근거한 정사다.
반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삼국지의 이미지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이자 각색된 역사극이다.
나관중은 진수의 정사, 민간 설화, 유학적 도덕관을 융합해
‘유비는 의로우며, 조조는 간사한 인물’이라는 도덕적 구도를 창조했다.
즉, 《삼국지연의》는 **명나라 성리학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역사’**인 셈이다.
🏯 한국사도 마찬가지였다 – ‘민족’은 언제부터 하나였는가?
한국사에서도 단일민족, 삼한일통 같은 말이 익숙하지만,
삼국 시대에 과연 그러한 인식이 존재했을까?
- 고구려는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후 국내성파와 평양파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연개소문 이후의 정치적 분열로 이어져 결국 멸망한다. - 백제는 초기 부여계와 한성계, 이후 사비계 세력이 충돌하며
의자왕 시기 항전이 좌절된 배경에도 귀족층의 분열과 이권 다툼이 있었다. - 통일신라 역시 통합되지 못하고, 결국 후삼국 시대로 다시 분열되며
고구려의 후예,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는 분리된 정체성이 나타난다.
즉, 삼국은 공통된 문화와 언어를 가졌을지언정,
‘하나의 민족’보다는 부족/지역의 의미가 더 강했던 시대다.

🏛 고려 – 민족 정체성의 출발점
진정한 민족 개념의 시작은 고려 중기 이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방제도가 완비되고, 지역 출신들이 함께 통합되는 구조가 생기며
비로소 ‘우리는 하나다’는 자각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자각은 역사서술의 변화로 드러난다.
-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적 정통론에 입각해
고구려·백제·신라를 통일된 국가 발전의 선형 서사로 정리했다. - **일연의 《삼국유사》**는 불교와 민간 설화를 받아들이며
각지의 다양한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우리’의 역사로 묶었다.
이 두 사서가 한국인의 자의식 형성에 기여한 상징적 출발점이었다.
🚫 환단고기와 유튜브 사관 – 역사적 책임을 외면한 해석들
하지만 최근 들어 《환단고기》나 유튜브발 민족사 해석은
사실보다는 상상에 의존하며,
역사적 자부심이 아닌 왜곡된 신화를 조장하고 있다.
- 고대 만주 지역 민족 대부분은 자체 사서 없이 중국사에 의존하거나
아예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 이러한 공백을 임의로 채우는 극단적 해석은
역사학의 발전이 아닌, 민족주의적 판타지에 가깝다.
역사는 결핍을 상상으로 채워선 안 된다.
✅ 맺음말 – 해석의 자유가 곧 책임이다
진수도, 나관중도, 김부식도, 일연도
각자의 시대적 가치관 속에서 ‘해석된 역사’를 남겼다.
그들은 당대의 질서와 의식을 반영하되,
그 나름대로의 ‘책임 있는 기록’을 지향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극단적인 역사 해석은
사료도 없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자기 확신에 불과하다.
그런 태도는 결국, 역사를 분열과 대립의 도구로 삼는 결과로 이어진다.
📌 그것은 이미 현대사에서 반복된 바 있다.
잘못된 민족주의는 타자에 대한 배타, 혐오, 전쟁까지 초래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쓰는 모든 ‘역사 해석’에는
그 무게만큼의 책임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