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 감성, 그리고 이분법 너머의 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어떤 때는 이성이 나를 끌고 가고,
어떤 때는 감정이 나를 지배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성이라는 건 내가 이 길을 가면 안 된다는 걸 인지하는 힘 같다.
마치 머릿속 어딘가에서 천사가 말리는 듯한 목소리다.
“그건 아니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하지만 감성은 또 다르다.
이건 해야 해,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욕망이자 직감, 혹은 스스로를 움직이는 어떤 납득할 수 없는 끌림이다.
그건 마치 악마처럼 유혹한다.
그런데 이게 참 묘한 게,
결국 어떤 선택이든 그 결과가 좋으면 ‘선한 판단’이 되고,
결과가 나쁘면 ‘감정에 휘둘렸던 실수’가 되어버린다.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결국 우리는
결과로 사람을 판단한다.
여기서 문득 떠오른다.
고대 성인들이 말한 성선설과 성악설.
맹자는 인간은 본래 선하다 했다.
‘측은지심’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거다.
그게 우리 안의 천사일지도 모른다.
순자는 달랐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욕망에 끌린다고 했다.
그래서 교육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말대로라면 악마는 원래부터 우리 안에 있는 거다.
그런데 말이지, 나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가
결국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너무 단순하게 자르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선이냐 악이냐, 이성이냐 감성이냐, 옳으냐 그르냐.
우리는 늘 무언가를 양쪽으로 나누고, 구분 지으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경계는 흐릿하다.
이성적인 판단이라 믿었던 것도, 사실은 감정이 뒷받침된 경우가 많고
감정적인 선택 같았던 것도, 결국 돌이켜보면 가장 이성적인 결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매 순간
나라는 내면의 목소리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간다.
그게 바로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묻고 싶다.
“이건 이성인가 감성인가”가 아니라,
“이건 내 안의 어떤 중심에서 나왔는가” 라고.
결국 모든 판단은 나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판단이 어디에서 왔는가보다,
그 중심이 어떤 의도를 담고 있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맹자의 말도, 순자의 말도 틀린 게 아니다.
둘 다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매일을 살아간다.
그날 나는 내 안의 두 목소리를 들었다.
하나는 말렸고, 하나는 유혹했다.
그 결과가 좋을지 나쁠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선택은,
분명히 ‘나의 판단’이었다는 것.
그게 지금 이 순간
내가 붙들고 싶은 진실이다.
그리고 문득,
오늘 당신 안의 목소리는 어떤 이야기를 건넸나요?
어쩌면 지금도 조용히,
당신만이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속삭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